레옹: 몸만 커버린 소년과 조숙한 소녀의 사랑

레옹

:몸만 커버린 소년과 조숙한 소녀의 사랑

순수라는 이름의 무지가 인생의 참된 가치인가

레옹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내심 마음속에 맴돌았던 생각은 '레옹이 마틸다를 만나지 않았다면...'이었다. 그는 "마틸다"라는 한 여자아이를 만나면서 자신의 모든 것, 심지어 목숨까지 잃게 된다. 또한 살면서 많은 어려움들을 직면하면서 속으로는 과거에 대한 동경을 일삼았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그때에는 몸에 아픈 곳도 없고, 지금과 같은 상처도 없었는데...', '그때는 돈 걱정 안하고...', '그때에는...'

나에게 있어 이런 식의 질문 중 가장 힘들었던 것은 '헤어질 줄 알았다면 만나지 않았다면, 차라리 모르고 살았다면...'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마음속에서 큰 확신이 생기는 것은 많은 경험들이, 특히 많은 고통과 슬픔들이 나를 성숙시킨다는 사실이었다. 내 무뎌진 손가락은 육체 노동을 통해 얻은 경험의 선물이며, 사랑하는 이와의 헤어짐은 그녀를 만나고 경험한 모든 과거의 아름다움을 더욱 가치 있게 해 주었다. 만일 일련의 모든 체험들을 얻지 못한 '순수'했던 과거로 돌려준다면 나는 점잖게 사양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수함이라 하기엔 너무나도 형편없는 미숙이며, 무지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김상준

이탈리아인 토니(대니 애로 분)는 레옹에게 사건을 중개하고, 그의 뒤를 봐주는 사람이다. 토니는 자신이 은행이라며 레옹의 돈을 맡아주기도 하며,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듯 레옹을 대한다. 레옹도 착한 아들처럼 그의 말에 순종하고 의지한다.
이 같은 관계는 한 눈에도 두 사람이 청소년기의 자식과 부모상, 또는 자식을 지배하려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와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레옹이 심리적으로 아직도 아동기에 머물러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또다른 상징은 우유이다. 우유는 혈연관계나 모성을 의미한다. 이로 보아 그는 성인이 되어서도 모성을 극복하지 못한 인물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몸은 커졌지만 정신의 성장이 멈춰버린 어른인 것이다.

토니 역시 레옹이 정신적으로 독립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레옹이 찾아오면 우유를 내놓는다. 물론 우유는 킬러로서 최상의 신체 상태를 유지시켜 주는 음료라는 이유도 성립된다. 레옹이 아직 정신적으로 부모에게서 독립하지 못했다는 것은, 레옹이 아끼는 화분을 통해 더욱 명확해진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레옹이 매일 창 밖으로 내놓아 해바라기를 시키는 화초는 사실 자기 자신이다. 화초는 화분에 담겨있다. 화분 속의 화초는 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 물을 주어야 하고, 온도와 환경을 맞춰 주어야 한다. 급격한 환경의 변화는 화초의 죽음을 가져온다. 이 화분 속에서 자라나는 화초처럼 레옹은 비록 잔혹한 킬러지만 실은 아직도 부모의 보살핌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다.

청소년기는 부모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점차 홀로서기를 준비해야 하는 시기이다. 그러나 레옹은 화분 안에 있는 것에 만족한다. 레옹이 자기의 분신인 화초를 가꾸는 데만 정성을 쏟는 것은, 그가 자기애(自己愛)에 빠져 남들과의 관계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른이 되는 단계에서 청소년들은 자기에 대한 관심을 밖으로 돌려서 남들과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리고 자기의 울타리, 즉 화분에서 벗어나야 한다. 화분 안의 화초는 화분의 크기만큼 밖에 자랄 수 없다. 더 자랄 수 없는 뿌리는 화분 안에 갇혀 답답한 숨을 내쉬게 된다.
토니라는 내재된 레옹의 부모상은 아들을 쉽사리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지배적인 부모는 아들의 독립을 용납하지 못한다.
레옹의 감정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이 부모로부터 떠난다는 것은 부모에 대한 배신이며, 지금까지 해오던 생각과 생활 습관을 바꾼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변화의 시기는 그래서 누구에게나 어렵다. "이 자리에 주저앉을 것인가, 아니면 나아갈 것인가."
그래서 레옹은 망설인다. 레옹은 열쇠 구멍으로 밖을 바라보기만 할 뿐, 좀처럼 밖으로 나서려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마틸다가 울면서 문을 열어 달라고 애걸하는 것이다.
"제발, 나를 들여보내 주세요."
그는 한동안 고민한다. 그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마틸다를 뒤쫓고 있는 위험 요소, 즉 살인자까지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안전을 뿌리째 흔드는 일이다.

갈등을 겪지만 결국 레옹은 조심스럽게 마음의 문을 연다. 그러나 레옹은 여전히 자기가 한 일에 대해 자신이 없다. 후회스럽기도 하다. 밤새도록 고민을 하는 그는 총을 빼들어 자고 있는 마틸다의 머리를 겨누어 본다. 그러나 방아쇠를 당기지는 못한다.
이것은 레옹이 부모의 품에서 편안히 안주하고 싶은 자신을 밖으로 끌어내는 마틸다의 존재에 대해 얼마나 두렵고 불안해하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레옹은 마틸다와의 만남을 통해 성장의 계기를 맞는다. 변신의 시기가 온 것이다.

투사의 양면성

자신의 무의식이 자기 안으로만 향하면 자기애에 빠진다. 이런 무의식의 부분은 그러나 의식이 아무리 끌어내려 해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무의식은 우리에게 한가지 해답을 가르쳐준다.
레옹의 의식 세계는 매우 빈곤하다. 감정의 지나친 억압과 부모상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채 자기 안에 사로잡혀 전혀 움직이려 들지 않는다. 이런 의식의 편중된 태도가 고쳐지기를 무의식은 기다리고 있다.
이때 무의식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는 방법은 '투사'이다. 즉,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외부의 대상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레옹에게 마틸다는 좋은 투사(投射)의 대상이다. 마틸다는 레옹이 갖지 못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가족이 살해된 후 앞 뒤 살피지 않고 원수를 갚기 위해 경찰서를 찾아가고, 레옹에게는 클리너가 되겠다며 총 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조른다. 싫고 좋은 표현을 똑 떨어지게 하며, 감정에 통제를 가하지 않는다. 또한 누구의 지시에 따라 하는 일을 싫어한다.

이에 비해 레옹은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만 머무르려 할 뿐, 밖으로 나가려 하질 않는다. 그저 부모의 통제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이런 점들이 바로 레옹이 끌린 마틸다의 장점이며, 쉽게 레옹이 부족한 부분을 알아낼 수 있도록 하게 한 투사이다.

무의식의 투사는 이런 긍정적인 면이 있는 반면 이것이 지나치면 상대방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잘못을 범하기도 한다. 첫눈에 반해서 맹목적인 사랑에 빠지는 경우가 바로 지나친 투사의 예이다. 그러나, 외부 대상에 대한 적절한 투사는 의식을 바꾸어 놓는다. 마틸다를 만난 레옹도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하나 둘 교정해 나가기 시작한다.
마틸다의 자유분방함 속에도 위험은 내재해 있다. 그녀는 현실 판단력이 모자라고, 참을성이 없어 충동적이다.
킬러는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참을성있게 때를 기다려야 한다. 현실적인 판단이 따르지 않으면 치명적인 위험에 빠지기 쉽다.

마틸다와의 만남은 예상대로 레옹의 생활을 혼란에 빠뜨린다. 그녀로 인해 이리저리 이사를 다녀야 했고, 이 과정에서 킬러의 생명인 익명성이 노출되고 만다. 그러나 이것은 레옹인 성장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 중의 일부일 뿐이었다.
그 성장의 대가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그의 마음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레옹의 감정이 살아나고 분화될수록 클리너로서의 절대 조건인 냉철함과 자기 절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녀는 돈도 받지 않고 마틸다의 원수를 해치워 준다. 그러나 그의 솜씨는 예전만 못하다. 중국인 거리에서 마틸다의 원수를 해치우고 돌아왔을 때도 그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는 샤워를 하며 자신의 상처를 꿰맨다. 그것은 성장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아픔이기도 하다.
그는 클리너의 계율을 어겼다. 킬러는 돈이 되지 않는 일, 그리고 감정이 개입된 사건은 절대로 맡지 않는 게 원칙이다. 그리고 또 하나, 그는 '아버지'의 지시를 거역했다.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은 사건을 독단으로 처리한 것이다.

내친 김에 레옹은 드디어 토니에게 벗어나고자 한다. 그래서 자기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의 돈을 모두 마틸다에게 주라고 요구한다. 이버지는 이런 '아들'의 변화에 대해 경고를 보낸다.
"너는 지난 번에도 여자 때문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니. 내 품안을 벗어나면 네겐 위험이 따를 뿐이야." 토니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레옹은 점점 그녀에게 빠져들었으며 심지어 질투까지 한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소년과 말을 나누던 마틸다를 심하게 나무라는 것이다. 허락을 받지 않고는 절대 딴 사람과 얘기하지 말라며.
레옹의 독립의지는 이런 작은 일에 그치지 않는다. 마틸다가 경찰서까지 찾아가 가족의 원수를 갚으려고 했으나 이번엔 자기가 직접 경찰서로 달려간다.

이제 킬러로서의 그의 생명은 끝났다. 특유의 동물적인 판단력도 이미 사라졌다. 그는 경찰서로 마틸다를 구하러 갔을 때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선택한 여자였기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고 마틸다를 구해낸다.

죽음이란 이름의 변신

이제 레옹과 악의 무리의 한판 대결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토니가 강력하게 만류하지만 레옹은 듣지 않는다. 아버지의 분노는 머리끝까지 뻗친다. 자기의 경고를 무시하고 레옹은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토니는 아들의 은신처를 스텐필드에게 고자질하고 만다. 그는 도저히 자신의 품에서 빠져나간 자식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레옹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일까?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레옹이 죽기 전 마틸다에게 맡긴 화초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화초는 그가 과거에 가지고 있던 행태나 사고, 생활 습관등을 버리고 죽음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쳐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레옹은 마틸다에 의해 땅에 심겨진다. 이제야 레옹은 죽음으로써 화분에서, 자기 안에서 빠져 나올 수 있게 되었다.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레옹은 이제 화분이 아닌 대지로부터 자기 안의 부족한 것을 마음껏 끌어낼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 화분 안의 화초보다는 땅에 뿌리를 박고 아무렇게나 자라는 잡초에게서 더 건강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그는 이름모를 풀이 되었으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며, 그 만큼 성숙하게 되었다. 화분에서 대지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많은 고통과 혼란을 겪긴 했지만.

<발췌: 김상준 "프로이트와 영화를 본다면", p14~p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