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글쓰기>

** 이 글은 <복음과 상황> 12월호에 실린 지유철님의 글입니다.

마감 시간을 훨씬 넘기고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이런 글을 올리게 됩니다. 쓰던 원고를 뒤로 밀치고 새로운 글을 쓴다는 것은 누구보다 자신에게 용납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가난의 문제에 대한 도서목록

이번에 제가 쓰려고 했던 주제는 누가복음에 나타난 가난의 문제였습니다. 이 주제를 쓰기 위해 저는 평소 참고하는 누가복음과 관련된 문헌들 이외에 몇 권의 책을 독파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로널드 사이더의 <가난한 시대의 부요한 그리스도인>, 손덕수·이미경이 공저한 <한국의 가난한 여성에 관한 연구>(민중사), 통합연구학회에서 '가난과 부요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를 다루었던 <통합연구> 11호,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이 그것이었습니다. 제겐 독서 내지 책 구입의 원칙이 있습니다. 아주 좋아하는 저자들의 경우, 어떻게 하든 출간이 무섭게 책을 사들입니다. 그리고는 반드시 빠른 속도로 한 번 읽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저자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아 몸살이 나거든요. 제게는 좋아하는 저자들의 책이 나오기가 무섭게 읽어주어야 한다는, 일종의 '거룩한(?) 의무감' 갖은 게 있나 봅니다. <가난한 시대의 부요한 그리스도인>은 구입 초기에 쭉 한 번을 훑고는 다시 들여다보지 못한 책입니다. 때문에 다시 읽되, 저자의 심장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를 듣는 것처럼 꼼꼼히 읽고 내용을 세밀하게 컴퓨터에 정리해 두고 싶었습니다. <한국의 가난한 여성에 관한 연구>(민중사)는 이화여대 서광선 교수가 일생 읽은 책 중 단 한 권의 책으로 추천했던 책입니다. 로널드 사이더와 통합연구학회지를 통해서는 가난과 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확실히 하고 싶었고, 헨리 조지를 통해 진보하는 문명에도 불구하고 가난이 심화되는 이유에 대한 통찰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한국의 가난한 여성에 관한 연구>는 서광선 교수가 그랬던 것처럼 이 땅의 가난한 현실에 대해 눈을 뜨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 이 책이 너무 낡았다는 것(1983년에 초찬이 나왔으니까)이 아쉽기는 했습니다만. 제가 이 책을 접한 것은 서 교수의 추천사를 읽고 난 한참 후의 일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허름한 책방에서 이 책을 구했지만 제대로 읽지를 못했었습니다. 때문에 이 책 역시 반드시 읽어야 했습니다.

저는 1세기를 소재로 글을 씁니다. 그런 연유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나 요하킴 제레미야스의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 그리고 케네스 베일리의 비유 연구서인 <시인과 농부>나 IVP <성경배경주석>과 같은 책들은 매우 소중합니다. 1세기의 시대상에 관한 매우 귀중한 자료들을 제공해 주니까요. 하지만 저는 20세기말을 사는 한국 사람이란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싶었습니다. 오늘 이 땅의 부조리한 경제적 불평등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가난에 대한 그 어떤 성경적 논의도 공허하다는 게 저의 신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누가복음의 이야기를 쓰면서 <한국의 가난한 여성에 관한 연구>와 같은 책을 읽어야 할 이유였구요.

자기 점검(1) - 글과 삶의 일치

그러나 이 달의 책읽기는 아주 부실했습니다. 12월호를 글쓰기와 관련된 내용으로 갑작스럽게 바꿀 만큼 말입니다. 책읽기의 실패가 문제였던 셈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결국 책을 만족스러울 만큼 읽지 못했다는 것으로부터 오는 중압감을 이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2차 텍스트에 지나지 않는 책들을 충분히 읽지 못한 것이 '로마통신'을 쓸 수 없었던 진짜 이유라는 뜻은 아니니까요. 누가복음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책들로부터도 많은 유익을 얻지만, 그래서 그 유익을 과소 평가할 맘은 없지만 2차적인 책읽기는 2차적 책읽기일 뿐 그 이상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책읽기에 연연하는 것은 그것이 저의 성실치 못한 삶에 탯줄을 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실패한 책읽기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제 삶의 실패를 꼬집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연유로 성실하지 못했던 저의 지난 한 달의 삶은 <데오빌로의 로마통신> 13회를 게제할 권리를 박탈해 버리더군요.

로마통신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을 때 저를 가장 많이 괴롭히는 것 중 하나가 한 달 동안의 삶의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로날드 사이더나 다른 저자들의 책들을 읽지 못한 것만으로는 제가 이렇게까지 기가 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글쓰기와 관련하여 세워 놓은 최소한의 목표도 이루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다보면 참담해지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가난이란 주제로 글을 쓰기 위해서 이 정도의 준비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우선, 성경 전체가 말하는 가난 내지 경제 문제에 대한 가르침에 나름대로나마 정통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성경이 침묵하거나 자세하게 말하지 않는 성경 시대의 경제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지식도 그렇다고 믿습니다. 오늘 이 땅의 불공평한 경제적 현실에 대한 이해도 놓쳐서는 안 될 대목이구요.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적어도 제게는 그렇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자기 점검입니다. 글과 삶의 일치입니다. 저는 80년대에, 검소한 생활과 이 땅의 경제적 불평등을 누구보다 앞장서서 고발하면서 자신은 사치한 생활을 즐기던 타락한 지식인을 여럿 보았습니다. 반면에 자신이 쓰는 글 때문이라도 철저한 금욕적 삶을 위해 몸부림치던,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분들도 뵐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글과 삶의 일치는 제게 매우 중요한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 문제 앞에서만 서면 긴장을 하게 됩니다. 제가 책읽기의 실패 앞에서 그렇게 초조함을 숨길 수 없는 것은 그 실패가 불성실했던 저의 한 달간의 삶을 여지없이 폭로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점검(2) - 기도, 모국어, 성경 사랑

그래도 여기까지는 괜찮습니다. 곤혹스럽기는 합니다만 빠져나갈 구멍이 없지는 않기 때문이지요. 왜냐하면 앞의 문제들이 삶의 핵심적인 문제는 될지언정 글쓰기의 핵심은 아닐 테니까요. 저는 문학(또는 예술)이란 메시지와 형식으로 구성될 뿐 아니라 그 두 가지가 대등할 정도로 중요하다는 문학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때문에 메시지를 어떻게 구성하고 표현할 것인지의 문제를 대수롭지 않은 문제로 치부할 용기는 제게 없습니다. 그건 신앙인의 바른 자세는 될 수 있을 지 모르나 기독 문학인이나 예술가의 바른 자세는 아니라 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작품의 문학적 실패를 그 작품을 쓰기 위해 투자했던 신앙적 노력(기도나 금식)으로 보상받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문학적 실패를 신앙으로 얼버무리려 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를 시도하는 것은 모두 성경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원고를 청탁 받고 크고 작은 글을 쓸 때마다 늘 기억하는 문구가 하나 있습니다. '기도 없는 연구는 무신론주의이며 연구 없는 기도는 광신주의다'라는 데일이라는 분의 말입니다. 사실 이 짧은 경구만큼 저의 글쓰기를 자극하는 말도 없습니다. 데일은 언제나 문학적인 자기 검증이 끝난 곳에서 다시 자신을 성찰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글쓰기라면, 그리고 정직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목적에서 쓴 글이라면 연구(글쓰기에 필요한 모든 준비)와 기도 사이의 조화는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데일은 상기시켜 줍니다. 설혹 모든 사람이 그 작품을 칭찬한다하더라도 믿음과 기도로 만들어 내지 않은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이의를 제기하신다면 그 글은 보잘 것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제가 글쓰기에 늘 자신이 없는 것은 원고를 위한 피를 말리는(?) 작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도가 약하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저의 기도 부족은 연구와 기도 사이의 불균형에서도 입증되지만 다른 일들과의 비교 속에서도 명백합니다. 간단히 말씀드려서 저는 설교를 위한 준비기도 만큼 글쓰기를 위한 준비 기도는 열심히 못했습니다. 기독교 세계관을 통해 이원론적 신앙의 폐단을 모르지 않는 사람이라면 설교와 글쓰기를 대하는 태도 사이에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머리로만 아는 것인지 저는 이제까지 설교를 위해서 만큼 글쓰기를 놓고 열심히 기도하지는 못했음을 부끄럽지만 인정하려고 합니다. 수련회를 위해서는 금식을 하였으나 글쓰기를 위해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모국어를 아름답게 쓰기 위해서 기울이는 노력만큼 글쓰기를 좀 더 잘하기 위해 기도의 시간을 확보하는 데는 게을렀습니다. 손봉호 교수의 논리 정연함과 철학적 통찰력, 리영희나 이현주나 박노해의 온몸을 불사르는 치열한 글쓰기, 정운영 한겨레 논설 위원의 해박함과 풍부한 인용을 배우기 위해 투자했던 시간에 비해 성경 앞에 머무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음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절의 김중배의 짧고 힘있는 문장, 김정란· 고종석으로 대표되는 젊은 지성인들의 매혹적이고 자유로운 글쓰기, 박완서의 깊이와 짧은 단문을 선호하는 요즘 세태를 비웃기라도 하듯 길게 늘어지는 김병익의 장문을 익히기 위해 노력한 것과 누가복음의 문체를 파악하기 위해 투자한 시간 사이의 불균형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매개로 글쓰기를 하는 제게 무엇보다 가장 부끄러웠던 것은, 그러면서도 차마 입을 열어 고백할 수 없었던 것은 성경에 대한 제 사랑의 부족이었습니다. 정말 제 마음의 바램은 한 달 내내 누가복음 속에 젖어 살고 싶었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으로 깊은 묵상을 하고 하루를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눈을 감아도 누가복음의 구석구석까지, 메모와 밑줄이 떠오를 정도로 제 성경책에 익숙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거의 언제나 희망 사항이었습니다. 컴퓨터에 누가 복음을 계속 써나가겠다는 결심을 몇 달이나 지속하다가 중단했는지, 저도 정확한 달수를 잊었을 정도입니다. 한 달의 준비 기간 중 겨우 20일에서 보름 정도를 남겨 두고서야 허둥지둥 성경과 참고 문헌을 붙들고 씨름하는 게 제 모습이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제 글쓰기와 삶이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가 아니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언제나 편집장님과 독자들이 두려웠습니다. 눈이 밝은 편집장님과 매우 예민한 후각을 지닌 복상의 독자들만큼은 저의 이러한 비리를 속속들이 알고 계실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삶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글쓰기

기독교 세계관의 입문을 끝내고 신앙과 학문에 대한 공부를 할 때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사실 그 전까지 제가 성경에서 배운 이웃 사랑이란 구제를 하거나 친절을 베푸는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자신이 전공하는 과학이나 문학이나 예술을 성실하게 함으로 이웃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구체적인 이웃 사랑의 실천이란 이야기는 들어보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하긴 철학과 같은 학문은 마귀 학문이기 때문에 자녀를 철학과에 보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교회 어른들의 생각이었으니 학문을 통한 이웃 사랑의 실천이란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저의 글쓰기는 언제나 세 방향으로 향합니다. 우선, 글쓰기는 저의 삶을 가꾸게 만듭니다. 한 편 한 편을 끝내는 것이 늘 고통스러우면서도 컴퓨터 앞에 앉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을 통하여 삶이 깊어지고 투명해지는 것을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글쓰기는 몸으로 보이는 친절함이나 구제 이상으로 고통 당하는 이웃이나 거칠어진 감정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의 감정을 순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훌륭한 이웃 사랑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제 글쓰기의 문제점은 이웃 사랑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고통에 빠뜨린다는 데 있습니다.몇 년 전의 일입니다. 그 때 저는 청년부 주보에 매주 칼럼을 연재하고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 그 칼럼에 대한 인기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저로 인해 마감시간을 늘 넘겼기 때문에 인쇄소 사장을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늦어서 철야 작업을 하게 되니까 주일 미사를 자꾸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기다리는 독자들을 위해 칼럼 쓰기를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한 영혼의 주일을 보장하기 위해 중단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론은 이웃의 고통을 덜어야 한다는 쪽으로 났습니다. 때문에 그 이후 제가 생각하는 글쓰기는 언제나 이웃의 고통의 문제와 직결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연유 때문에 제 글쓰기는 제 삶의 무게만큼이나 무겁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글쓰기를 중단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나마 글쓰기를 내려놓았을 때 제 삶이 보다 무거워 졌던 기억 때문입니다. 오늘도 저는 글쓰기를 놓고 고민합니다. 제 삶의 무게에 덜도 더도 아닌 만큼의 심각함을 가지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