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미국에게 당할 수 밖에 없는 이유

한국이 미국에게 당할 수 밖에 없는 이유

책 소개를 하면서...

강준만 교수가 칭찬해 마지않는 오연호 기자에 대한 느낌이 좋았음을 미리 말해야만 하겠다. 왜냐하면 그 책의 제목에서 오는 그릇된 선입견을 벗겨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이 미국에게 당할 수 밖에 없는 이유"
책 제목에서 오는 느낌은 미국을 향한 사대주의 정도로 밖엔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이라면 이런 제목의 책에 '욱'하는 감정이 생기지 않을리 없다.

하지만 오연호라는 이름과 미국이라는 화두는 물과 기름같은 존재임을 알게 되었을 때, 책에 대한 남다른 느낌과 호기심이 생겼다. 오연호씨는 흔히들 얘기하는 "반미기자"로 유명하다. 그가 이제껏 쓴 책만 보더라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가 쓴 세권의 책을 말하자면, "더이상 우리를 슬프게 하지말라"는 발로 찾은 주한미군 범죄 45년사였고 "살아있는 임진강"은 주한 미군 범죄가 파괴한 한 가정의 눈물겨운 복원사였으며, "우리 현대사의 숨은 그림 찾기"는 미국의 한반도 정치 공작사였다. 지금은 월간 "말"지의 기자로 뛰고 있는 그가 미국에 대해 말했다면 한 번 들어볼 만하지 않겠는가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고 그의 미국 생활을 통해 얻은 이 한 권의 책은 참으로 탁월한 지적이었다는 것이 읽은 후의 소감이다. 그는 미국을 "삼겹살 미국인"이라고 말한다.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서로 다른 정치적 성향들을 잘 지적한 말이다. "삼겹살 미국인"을 바로 이해할 때, 우리는 세계화라는 화두 안에서 한국인의 자리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사서 읽기를 권하며, 여기에는 한 편의 이야기만을 적어 본다.

엘빈 토플러에게 한국의 미래를 묻지마라

대한민국이 사라지고 있다. 개인이든 단체든 국가든 성공비결의 3대 요소는 첫째 스스로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바탕으로, 둘째 자기에게 맞는 발전전략을 세워, 셋째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비용을 효율적으로 조달하고 활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의 흐름을 보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존재는 위 세단계 모두에서 사라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경제진단은 미국의 신용 평가 기관인 무디스의 손에 달려있다. 경제 운용 자금은 미국 자본이 주도하는 국제통화기금, 즉 IMF의 입김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게다가 우리는 이런 처지에서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발전 전략 개발 측면에서도 미국 지식층과 그들의 인식틀을 따라 배운 미국 유학파에게 의존하고 있다.
대통령 취임 연설이 그 한 예다. 1998년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 연설을 주의 깊게 들은 사람은 '엘빈 토플러가 취임사를 썼나'하고 느꼈을 것이다. 정보화 시대로 귀결되는 토플러의 문명 발달사론을 대통령이 길게 언급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 토플러가 얼마전 방한 쇼를 벌였다. 그의 입국 목적은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한국의 경제문제에 관해 조언해 주는 것이었다.
토플러는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한 시간의 단독면담을 통해 한국 경제를 살리는 방법에 대한 아이디어를 풀어 놓았다.
그 밖에도 토플러는 1주일 체류기간 동안 한국을 움직이는 사람들을 만났다. 이종찬 안기부장 등 정부 실력자들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등 재계 실력자, 그리고 언론사 간부들을 만나 정보화 시대에 한국이 나아갈 길에 대해 조언했다.
엘빈 토플러는 한 사람의 미래학자일 뿐이다. 어느 한국 학자가 워싱턴에서 그토록 화려한 면담을 할 수 있을까> 클린턴 대통령과 미국 CIA 지부장, 그리고 미국 제계 1위의 기업총수를 독대할 수 있는 한국 학자는 누구일까?

토플러 방한 쇼는 미국의 지식권력에 대한 한국의 사대주의와 한,미 지식산업의 불평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토플러가 방한 중 풀어놓은 보따리는 그리 새로운 게 없었다. 그가 전한 메시지의 핵심은 세계는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으며 우리가 그것에 재빨리 적응하지 않으면 미래쇼크라는 질병에 걸린다는 것이었다.
토플러는 그 메시지를 지난 30년간 "미래쇼크", "권력 이동", "제3의 물결"을 통해 펼쳤다. 토플러를 좀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은 정치인이 있다면 '사진 찍는 면담' 일정을 잡느라 애쓸 게 아니라 하룻밤만 시간을 내 세 책 중 한 권을 읽어보면 그만이었다.
토플러는 세계 문명의 흐름을 자기 화법으로 말하는 자이지 한국 경제에 대한 처방을 내릴 수 있는 만능 의사가 아니다. 그런데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공개 강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에게 한국 정치와 교육의 개혁 방향에 대해 질문했다.
토플러는 "솔직히 말해 나는 한국 상황을 잘 모릅니다만"하고 답변을 시작했는데 그것은 겸손이 아닌 것이다. 토플러가 무게 실린 답을 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미국병'과 '정보화 시대병'에 대한 그의 시각일지 모른다.

국회 강연 후 토플러를 인터뷰했다.
"정보화 사회의 선두를 달리고 있는 미국에게 왜 인간의 행복지수는 제자리이거나 후퇴하고 있습니까? 미국은 이혼율, 범죄율, 마약 복용률들이 그 어느 나라 못지않게 높지 않은가요?"
"나는 통계를 믿지 않아요. 미국 중산층 가정들은 생각보다 건강하고, 범죄율도 낮아지는 추세죠. 많은 학자들이 미국은 망해간다고 했지만 끄떡없지 않은가요?"
"정보화 사회의 무한 경쟁과 끊임없는 과학 기술 발전이 초래한 인간성 상실 등을 지적한 미국의 테러리스트 유나바머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도 그가 쓴 논문을 읽어봤는데, 한마디로 정신나간 사람이에요."
토플러는 제4의 물결은 생명공학과 우주과학의 혁명적 변화가 주요 동력일 것이라면서 조만간 인간 복제 등이 상품화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토플러는 미국의 힘과 건강성을 믿지만 그것보다 '변화'를 우위에 둔다는 점에서 확실히 미래학자다. 그는 향후 50년은 이전의 500년과 같은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면서 50년 후의 미국은 유일 최강국의 위치를 잃을 수도 있고 한 나라가 아닐 수도 있다고 했다.

토플러는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강상현 교수의 표현처럼, 정보화 선교사다. 그렇지만 그는 정보화 사회의 최첨단을 달리고 있는 미국 사회의 병을 어떻게 치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남은 답은 갖고 있지 않다. 그의 관심은 해법이 아니라 미래의 변화에 대한 소개다.
토플러는 자신이 소개한 사회가 인류에게, 한국 국민들에게 행복 지수를 높여줄 것인가에 대한 관심은 많지 않다. 그래서 그의 자문을 열심히 따라가면 얻는 것만 있는 게 아니다. 유나바머를 정신나간 사람이라고 간단히 말해 버리는 그는 유나바머만큼 세상을 보는 기준이 편향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엘빈 토플러의 한국 쇼가 아닌 한국의 엘빈 토플러가 필요하다. 우리의 지식 산업이 발달해야 정보화 선교사 엘빈 토플러가 말하는 것 가운데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를 알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 여과 장치 역할을 할 수 있는 지식인들이 없는 상태에서 앨빈 토플러가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 정보화와 세계화 문제를 놓고 조언을 했다면, 대한민국은 정말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우리 지식인이 있는데도 앨빈 토플러의 유명세만 보고 그를 초빙했다면 대통령의 참모들은 진정 부끄러워해야 한다.

토플러가 방한 중일 때 수십 명의 한국언론학회롸 한국사회학회 학자들이 '정보화 시대의 매체 정책과 문화 정책'이라는 주제로 공동 세미나를 열고 6백 페이지가 넘는 결과물을 내놓았다. 그 논문들 가운데는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백선기 교수의 글처럼 정보화를 주도하는 미국이 놓아둔 덫을 경계하는 것도 있다.
트플러를 초청한 참모들은 우리 학자들이 내놓은 그런 논문을 대통령에게 읽어보도록 권했을까? 그런 모임이 있었다는 것을 알기라도 할까?

우리가 토플러에게 배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을 보는 그의 눈이 아니라 자기 일을 해나가는 자세다. 토플러는 10년동안 취재해 한 권의 책을 낼 정도로 일에 있어 완벽을 추구한다. 그의 취재 무대는 세계 곳곳으로 어느 한쪽에 편중되지 않은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
또한 토플러는 부부간에 금실이 좋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혼율 50%인 나라 미국에서 그는 평생을 부인과 함께 공동 저술해 오고 있다. 문제도 많고 탈도 많은 미국 사회를 이끌어가는 미국 지식인 집단의 건강성이 그에게 있는 것이다.
토플러의 일하는 자세를 배우자. 그러나 그의 세상 보는 눈을 그대로 따르지는 말자.
첫머리에서 '대한민국이 사라지고 있다'고 한 나의 우려는 다소 과장이 섞인 것이다. 그러나 무디스와 IMF의 한 마디가 우리 경제를 뒤흔들고 있는 이때, 무엇이 우리의 눈이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지식 산업마저 붕괴된다면, 대한민국은 정말 사라지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