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비평집: 반세기의 신화...

리영희 비평집: <반세기의 신화>

들어가면서

리영희 교수의 남북에 대한 총체적 글들을 접할 수 있을 법한 비평집이 나왔다. 부제 "휴전선 남북에는 천사도 악마도 없다"가 시사하듯이 리영희 교수의 진보적 통일관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의 표지에 이 책에서 리 교수가 제시하는 통일에 관한 시각이 단적으로 드러난 부분이 실려 있는데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50년 동안 각기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아온 두 개의 사회가 다시 하나가 되자는데, 어떻게 한쪽만 변해야 하고 다른 한쪽은 변하지 말아야 하는가? 현실세계에서 어떤 사회는 절대 선이고 어떤 사회는 절대 악일 수 있는가?......그 천편일률적인 주장들이 판을 치는 곳에서 나는 외롭다. '북한이 남한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남한의 얼굴을 한 번쯤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물론, 통일에 관한 한 나는-물론, 보수주의자들 같지는 않지만-북한의 체제가 많은 부분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붕괴가 더 적절한 표현이겠다), 한국 사회 속에서 드러난 자본주의의 폐해들을 접어둔 채 북한은 악, 남한은 선이라는 단순한 양극화에 반대하는 리 교수의 지적을 한 번쯤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본서에는 실로 다양한 내용의 글들이 실려있어 누구나, 아니 통일을 갈망하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 리 교수의 글들을 읽어봐야 할 것이라 여겨진다. 황장엽과의 대담도 흥미로웠고, 또한 책의 전반부에 실린 리 교수의 실제 집안 얘기에서는 개인적으로도 참 마음이 착찹했다.

여기에는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부탁"을 발췌하려 한다. 아는 이들은 알겠지만, 본인은 현 정권에 많이 호의적이다. 물론, 여기엔 강준만 교수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겠다. 강 교수의 지적대로 지난 대선을 놓고 보았을 때, 많은 분들도 그랬겠지만 내 입장에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지금도 그 '선택'에 대해서는 후회가 없다. 그렇다고 때때로 일어나는 정부의 답답한 정치 행각들에 대해 쌍수들고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여야 대립구도에선 여당을 상대적으로 '낫게' 여기는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즈음에서 균형잡힌 입장(?)을 취해볼 겸, 관련된 글을 한 번 실어본다. 물론, 아래에 리 교수가 주장하는 text인 '준법서약서'에 대한 생각에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단지, 마지막에 언급했던 부분인 소수의 극우, 반동, 수구세력들을, 비록 그들이 수적으로는 소수일지 모르나 오히려 그들을 영향력이라는 잣대로 평가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그 영향력 때문에 김 대통령이 한 걸음 물러섰을 것이라는 점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기도 하다. 상황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그렇게' 나아진 것은 아니리라.
부디, 일독을 권한다.....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부탁

존경하는 김대중 대통령님.

오늘 여기, 여러 날의 망설임과 많은 생각 끝에 경애하는 김 대통령에게 글월을 드리려 결심하게 된 사람은, 지난 오랜 군부 독재 아래서 김 대통령께서 정치적 견해를 달리 한다는 이유로 온갖 박해의 수난을 겪던 시절, 때로는 같은 형무소의 감방에서 때로는 폭력이 난무하는 공포의 현장에서 미약하나마 동지적 길을 함께 걸어왔던 대학 재직의 한 지식인입니다.
정권교체를 이룬 뒤 지난 1년 동안, 재정이 파탄 난 국가를 바로 잡으려고 당선의 기쁨도 누리지 못한 채 밤낮으로 노심초사하는 김 대통령의 건강을 멀리서 염려하고, 민족사의 길이 빛날 번영과 민주화의 대업을 이룩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는 사람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와 같은 동지적 심정인 까닭에 본인은 아무런 사심 없이 김 대통령에게 한 가지 간곡한 부탁을 드리려 합니다.
그것은 '세계인권선언'이 규정한 '시민적 권리와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고 행사하다가 투옥되어 있는 이 나라의 수많은 선량한 시민들의 운명에 관해서입니다. 들리는 바로는 민족의 영광인 3.1절 80돌 축하로 정부는 큰 사면조처를 실시하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반가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번 사면조처에서도 지난 해와 같이 이른바 '준법서약서'라는 것을 사면의 조건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듣고 있습니다.

경애하는 김대중 대통령님.
소위 '준법서약서'라는 것은 불법, 부당합니다. 지난 날 바로 그 악법에 의해서 수없이 죽음의 고비를 넘어온 김 대통령의 특단의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김대중'이라는 대통령이 포악, 무지한 역대의 전임자들과 다르다는 것을 국민 앞에 입증하고 역사에 그렇게 기록되고 남겨지기 위해서라도 그들에 대한 조건없는 사면이 집행돼야 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조약이니 법규니 법이론의 시비에 앞서서, 가장 평범하고 초보적인 도리에 어긋나고 상식에 어긋납니다. 국가의 기본 질서를 파괴하고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의 사회, 경제적 파탄을 초래한 최고 책임자요 파렴치범인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과 그 추종 집단들은 '준법서약서' 같은 것을 쓰지 않고 전원이 사면되어 천하를 활보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김 대통령의 이념이고 정책 목표인 '자유시장과 민주주의'에도 어긋납니다. 경제적 자유시장도 정치, 사회적 민주주의도, 사회 구성원의 사상의 다양성과 의사 표시의 자유를 토대로 하고 전제로 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은 문명 사회의 철칙입니다.

셋째로, 국가보안법 그 자체는 두말 할 것도 없거니와 그 악법으로 투옥된 인사들에 대한 소위 '준법서약서'도 '세계인권선언 II 3', 즉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제18조(사상, 양심, 종교의 자유)와 제19조 (표현의 자유)를 비롯한 많은 조항에 위반하는 것으로, 유엔과 민주, 문명 사회의 비난과 묘멸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올해는 세계인권선언 발표 제51돌이 되는 해입니다. 대한민국은 이 이상 언제까지 더 문명세계의 규탄과 멸시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까?

넷째로, 정부는 '준법서약서'의 국제법젹 근거로 '세계인권선언 II 3 제19조의 단서 b' (나라의 안전, 공공질서, 공중건강 또는 도덕의 보호)를 내세우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단서 b'는 항구적 규정이 아니라 50년 전 선언 발포 당시의 '잠정적' 성격의 것입니다. 또 대한민국의 안전과 공공질서와 사회의 건강과 국민적 도덕을 여지없이 파괴하고 유린한 전직 대통령들과 그 권력집단과 정치인을 비롯한 '힘있는 자'들은 앞서 지적했듯이 아무것도 쓰지 않고 석방되고 사면되었습니다. 이것을 국민이 납득하지 못합니다.

다섯째로, 지금 국가보안법으로 수감중인 사람들은 김 대통령 자신이 지난 날의 민주화, 인권, 양심, 자유를 위한 운동과 수난의 과정에서 확인했듯이, 진실로 이 나라와 사회의 정의로운 발전을 희구하고 행동하는 선량한 분자입니다. 나라와 사회의 꼴을 외면, 방관할 뿐 괴로워 할 줄 몰랐던 사람들보다 몇 십 배 애국자들입니다.

여섯째로, 남한(한국)의 정치 도덕이 북한보다 우월하다는 증거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햇볕' 정책이나 '포용' 정책으로 북한의 공산주의자들과의 화해를 모색하는 정황이라면, (국가보안법은 잠시 미루는 한이 있더라도) 그 악법의 희생자들의 조건없는 석방과 사면이 지극히 당연한 논리가 아니겠습니까?

일곱째로, 혹시 김 대통령께서 아직도 냉전시대의 몽매 상태에 있는 소수의 극우, 반동, 수구 세력에 배려해서 '준법서약'이라는 구차스러운 절차를 허가하셨다 하더라도 이제는 상황이 웬만큼 달라졌다고 평가됩니다. 취임 이후 1년간의 제반 정책집행을 통해서 김 대통령에 대한 그들의 근거없는 곡해는 '준법서약' 없는 사면을 수용할 만큼 바뀌었다고 믿어집니다. 이제는 집행할 때입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해서 (사실은 더 많은 이유가 있지만) 본인은 지금도 옥중에 있는 수많은 '인권사범'들에게 '준법서약'이라는 굴욕을 강요하지 말고 3.1절 사면의 은전으로 김 대통령님의 역사적인 '제2의 건국' 사업에 동참할 수 있도록 스테이츠맨 다운 일대 영단을 내리시기를 부탁합니다.

**이글은 3.1절 사면을 앞두었던 1999년 2월 10일 <한겨레>에 실렸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