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사의 서론을 어떻게 쓸 것인가

21세기사의 서론을 어떻게 쓸 것인가

들어가면서

강만길 교수의 새 비평집이 나왔다. 요즘 도서출판 삼인에서 계속 진보적 지식인의 비평집을 내고 있는데 리영희 교수에 이어 강만길 교수, 그리고 곧 신영복 교수의 비평집이 나온다고 하니 개인적으로 정말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강만길 교수는 <역사를 위하여>라는 책을 통해 처음 글로 만났다. 그 당시 나의 한국사 지식은 거의 전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그 책을 통해 보다 살아있는 역사를 볼 수 있게 되었고, 좀더 넓은 시야로 역사를 바라보아야 하겠다는 다짐도 하였었다. 이후에 새로 나왔던 그의 강의들을 편집한 저서인 <20세기 우리역사>는 개인적으로 국사 교과서로 사용해야 한다고 말할 만큼 가치있는 책이라고 생각된다. 최근에 많이 발견된 사료들을 적극 활용하였고, 단순한 사실의 나열뿐 아니라 역사의 흐름과 방향성에 대한 강 교수의 주장에도 많이 수긍이 갔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앞두고 20세기를 돌아보고 나아가 21세기의 서론이라는 화두를 넌지시 펼친 강만길 교수의 새 저서에 참으로 반가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 분의 연세가 이제 66세를 넘어섰다. 그쯤 되면 이제 쉬고 싶은 마음 간절하겠으나 역사가로서 새로운 것들이 발견되면 전하고 싶어 하시고, 또 원고청탁 들어오면 거절하지 못하는 진지한 사명감으로 인해, 우리는 아직도 강 교수의 뒤어난 시각을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라 생각하면, 그 분의 장수를 빌어야 겠다는 사명감(?) 또한 드는 것이 사실이다. (^^;)

아직 책을 다 읽지 못하였으나, 우리 나라의 고질적 병폐인 "지역감정"에 관한 글이 실려 있어 발췌해 본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일독을 정말로 권한다.

현대 정치와 지역 감정

어느 민족 사회를 막론하고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했던 중세 시대에는 정치적 지역성과 문화적 지방색이 강하게 남아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근대 사회로 오면서 국민 국가가 성립되면, 정치적 지역성에서 배태된 지역 감정은 애국, 애족심으로 상승, 해소되고, 문화적 지방색도 어느 정도 통일되게 마련이다. 정치적 지역성 내지 지역 감정은 해소되는 한편, 문화적 지방색은 그대로 유지, 보존됨으로써 민족 문화 전체의 다양성을 높이려 하고 그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인정되기도 한다.

우리 민족의 경우 근대 국민 국가를 성립시키는 과정에서 일본 제국주의에게 강점당했고, 일제 강점자들은 효과적인 식민 통치를 위해, '분열시켜 통치하는 방법을 쓰려고 했다. 그러나 우리 민족 사회는 종족적 차이나종교적 차이 등을 통해 '분열시켜 통치하는' 방법을 적용시키기는 적합하지 않았고, 대신 주로 지역 감정과 계급적 차이 등을 부각하여 '분열시켜 통치하는' 방법을 썼는데,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해방 후 좌우익 정치 세력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크게 부각됨으로써 지역 감정을 정치적으로 이영할 상황은 못 되었다. 그러나 5.16 이후 역사적 정통성과 정치적 정당성이 전혀 없는 군사 정권이 권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지역 감정을 크게 조작해서 이용했고, 전두환 정권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폭발한 5.18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지역 감정의 정치적 악용은 절정에 이르렀다.

아주 상식적으로 말해서 근대 사회의 정치 세력들은 정당을 조직화하고 정강-정책을 내세워 그것이 국민들의 지지를 많이 받게 되었을 때 선거를 통해 집권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지역 감정 같은 것이 이용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지역 감정 이란 것은 역사적 정통성과 정치적 정당성이 없거나 있다 해도 대단히 약한 정치 세력이 억지로 권력을 장악하거나 유지하기 위해 이용하는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정통성과 정당성이 높은, 즉 민주적 정치 세력은 지역 감정에 호소하거나 이용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정치권에서 지역 감정을 부추기는 세력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적 정통성 및 정치적 정당성이 약하거나, 정강-정책의 우수성을 통해서 정권을 획득할 가능성이 없음을 스스로 아는 정치 세력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언제나 시대에 뒤떨어진 정치 세럭은 있게 마련이며, 그들이 살아 남기 위해 지역 감정 같은 것을 이용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국민들이 그들 정치 세력의 낙후성이나 반시대성을 제대로 아는 일이 중요하다.

우리 정도의 문화 민족 사회에서 역사적 정통성 및 정치적 정당성이 아주 없거나 취약한 군사 정권이 30년 동안이나 계속된 것은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청산하기 위한 민주화 투쟁이 줄기차게 계속되어 결국 종식시키고 만 것은 당연하면서도 또한 자랑거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지금 문민에 의한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지역 감정에 호소하는 '정치'를 다시 하려 한다면, 그것은 우리 국민의 정치 문화 수준을 제대로 모르는 작태라 말할 수밖에 없다.

(1999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