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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실천하는 개혁' 왜 다시 다산인가

다산 정약용(1762~1836)을 형용하는 말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는 18세기 조선 문예부흥기의 가장 높은 자리에서 피어난 꽃이었으며, 중세의 어둠을 헤치고 근대의 여명을 밝힌 실학의 개척자이자 학문의 전복자였다. 그의 학문세계가 하도 넓고 깊어 후학인 추사 김정희는 감히 그 세계를 논평할 수 없다고 했다. 위당 정인보는 조선의 역사를 알려면 다산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다산학이야말로 조선의 온갖 사상과 학문을 다 품고 있다고 본 것이다.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는 사상가이자 경세가로서 시대의 난제를 붙들고 싸웠던 이 예외적 인물의 75년 삶을 찬찬히 살핀 다산 전기다. 지은이 박석무(61·전 학술재단 이사장)씨는 1970년대 초반부터 30여년 동안 다산을 연구해온 이 분야의 전문가다. 그는 13, 14대 국회의원을 지낼 때도 국회 안에 다산사상연구회를 조직해 다산의 학문적·실천적 고민을 우리 시대의 문제로 되살리는 데 힘썼다. 15년 가까운 세월을 들여 펴낸 이 책에서 그는 다산의 드넓은 사상세계뿐만 아니라, 이재(異才)니 기재(奇才)니 하는 찬사를 받았던 대문호의 시세계를 활짝 펼쳐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성리학 이데올로기의 강압에 정신이 억눌리고 지배층의 가렴주구에 백성의 등골이 내려앉던 시대에 온몸으로 그 시대의 장벽을 돌파하려 했던 한 비범하고 영민한 인물의 고뇌와 투혼을 실감 있게 그리고 있다.

다산의 일생은 18년 단위로 나뉜다. 스물두 살에 진사 시험에 급제한 그는 학문을 사랑했던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18년 동안 그와 고락을 함께한다. 1800년 정조가 비명에 죽고 반대파가 권력을 잡자 그는 난신적자로 몰려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한다. 쉰일곱에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그는 이후 고향 경기도 양주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낸다. 당대의 계몽군주와 함께 학문과 국사를 고민했던 그는 그때의 경험을 살려 강진 유배 시절에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를 비롯한 불후의 저작들을 완성했다.

다산이 세운 거대한 지적 건축물의 두 기둥은 공맹과 서학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그는 지배이데올로기로 굳어진 성리학을 깨뜨려 공자와 맹자의 근본 원리를 되살렸으며, 서양학문을 빨아들여 이 원리에 실용성과 현실성을 주입했다. 유교사상의 혁신자이자 실학사상의 주창자는 이런 경로를 거쳐 태어났다. 근대 유럽의 학문사정에 비유하자면, 그는 ‘헤겔 좌파’였다. 철학자 헤겔에게서 보수적 우파와 진보적 좌파가 형성됐듯이, 다산은 실학의 선구자인 성호 이익에게서 발원한 두 파 가운데 진보파에 속했던 것이다.

‘성호 좌파’는 서양 학문을 받아들여 공부하는 데 열성이었다. 반면에 ‘성호 우파’는 서학을 비판하고 공격했다. 여기에 다산의 영화와 고난의 모든 원인이 있다. 이 책은 젊은 시절 다산의 정신을 키운 지적 환경에 주목한다. 최초의 천주교 신자 이벽을 비롯해 윤지충·이승훈·황사영·정약종 등 초기의 순교자들이 모두 다산의 가까운 친인척이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강했던 그는 그들과 더불어 <천주실의>와 같은 천주교 서적을 탐독하고, 천문·농정·수리 등에 관련된 서양과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바로 이런 관심 때문에 그는 정조 사후 터진 신유박해 때 천주교도라는 모함을 받고 유배를 당하는 처지가 된다. 권력을 되찾은 노론 벽파가 반대파를 소탕하기 위해 찾아낸 명분이 척사위정이었고 다산이 거기에 휘말린 것이다.

다산에게 정말 중요했던 것은 ‘실용’과 ‘실천’이었다고 이 책은 강조한다. 그의 실용주의를 보여주는 적절한 사례가 그가 직접 설계하고 감독한 수원 화성일 것이다. 다산은 정조의 명을 받아 화성을 축조하면서 노동력을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는 거중기를 만들어냈다. 도르레 원리를 원용한 거중기로 그는 백성을 노역에서 해방시키고 막대한 비용을 아꼈다. 창궐하는 질병으로부터 인민을 구제하기 위해 <마과회통>이나 <촌병혹치>와 같은 방대한 의서를 쓴 것도 그의 실용주의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실천’ 혹은 ‘행위’라는 개념으로 성리학의 관념주의를 혁파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그는 인간의 선한 본성만 지키면 만 가지 일이 모두 해결된다는 주자의 성리학적 사고를 거부하고, 아무리 훌륭한 성품을 갖추었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선한 성품을 행동으로 옮겨야만 덕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주장을 폈다. 일종의 ‘실천철학’인 셈이다. 그런 실천적 철학 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었기에 그는 백성들이 겪는 끝 모를 고통에 동참하는 수많은 사회비판시를 쓸 수 있었고, 그들의 고통을 재생산하는 사회구조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변혁적 사고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이 책은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당대의 정치체제를 완전히 뒤엎어야 한다고 본 것은 아니다. 그는 다수 민중이 아닌 현명한 군주를 변혁의 주체로 상정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압박 받는 인민들이 정당한 삶을 살아갈 공정한 세상을 만들자던 다산의 구상과 노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깊은 울림을 지니고 있다고 지은이는 강조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